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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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남북 전쟁 중에 치러졌으며,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국민연합당 후보로 나선 링컨은 민주당의 조지 B. 매클레런을 상대로 전쟁 지속을 통한 노예 해방을 주장했고, 25개 주에서 212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며 승리했다. 이 선거는 전쟁의 진행, 흑인 투표권, 그리고 휴전 문제 등 다양한 쟁점을 다루었으며, 링컨의 승리는 전쟁의 종결과 노예제 폐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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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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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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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선거 이름 |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국가 | 미국 |
국기 연도 | 1863년 |
선거 유형 | 대통령 |
선거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860년 |
다음 선거 |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868년 |
투표율 | 73.8%http://www.presidency.ucsb.edu/data/turnout.php 7.4 pp 감소 |
선거일 | 1864년 11월 8일 |
선거인단 투표 수 | 234명 (+17표 무효) |
필요 선거인단 수 | 118표 |
후보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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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에이브러햄 링컨 |
정당 | 국민연합당 (미국) |
제휴 정당 | 공화당 (미국) 전쟁 민주당 무조건적 연합 |
출신 주 | 일리노이 |
러닝메이트 | 앤드루 존슨 |
선거인단 투표수 | 212 (+17표 무효) |
승리 주 | 22 (+2표 무효) |
득표수 | 2,218,388 |
득표율 | 55.1% |
후보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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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 조지 B. 매클렐런 |
정당 | 민주당 (미국) |
출신 주 | 뉴저지 |
러닝메이트 | 조지 H. 펜들턴 |
선거인단 투표수 | 21 |
승리 주 | 3 |
득표수 | 1,812,807 |
득표율 | 44.9% |
대통령 | |
선거 전 대통령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전 정당 | 공화당 (미국) |
선거 후 대통령 | 에이브러햄 링컨 |
선거 후 정당 | 국민연합당 (미국) |
2. 후보 선출
국민연합당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 후보로, 앤드루 존슨 테네시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각각 선출했다.[6] 링컨은 공화당 소속이었으나, 전쟁 민주당(War Democrats)과의 협력을 통해 국민연합당(National Union Party)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평화 후보' 조지 B. 매클레런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반전 하원의원 조지 H. 펜들턴을 부통령 후보로 각각 선출했다.[6][14]
1864년 민주당 후보 | |||||||||||||||||||||||||||||
매클레런 | 펜들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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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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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미국 육군 참모총장 (1861–1862) | 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주 제1선거구 (1857–1865) | ||||||||||||||||||||||||||||
선거 운동 | |||||||||||||||||||||||||||||
1864년 5월, 공화당 내 흑인 투표권을 주장하는 급진세력은 급진공화당을 창당하고 존 C. 프리몬트 전 상원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으나[6], 프리몬트는 이후 후보직을 사퇴하고 링컨을 지지했다.[7]
2. 1. 국민연방당 (공화당)
1864년 6월, 전쟁에 찬성하는 일부 민주당 세력이 공화당에 합류해 국민연방당을 창당했다.[7] 국민연방당은 공화당에 투표하지 않을 전쟁 민주당원과 남부 국경 주 연합주의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용된 임시 명칭이었다.[7]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공화당 내에서도 정치적 의견이 갈렸다. 찰스 서머와 헨리 윌슨 상원의원은 헌법 수정을 통해 노예제를 금지하고 법 앞에 인종적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모든 북부 공화당원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앤드류 존슨 테네시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하여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6]
당 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목표가 포함되어 있었다.[11]
- 남부 연합의 무조건 항복까지 전쟁을 지속할 것
-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 수정안
- 부상당한 연합군 참전용사 지원
- 유럽의 중립 유지
- 몬로 독트린 시행
- 이민 장려
- 횡단 대륙 철도 건설
또한 흑인 군인의 사용과 링컨의 전쟁 수행 능력을 칭찬했다.[11]
재임 중인 부통령 해니벌 햄린이 연임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전 테네시주 상원의원이자 현 테네시주 군사 주지사인 앤드류 존슨이 링컨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64년 존슨은 링컨의 부통령 후보로서 논리적인 선택이었는데, 링컨은 특히 국경 주들의 선거인단을 확보하기 위해 재선 운동에서 국가 통합의 메시지를 보내고자 했다.
대통령 후보로 한때 고려되었던 인물들로는 전 상원의원 대니얼 디킨슨, 벤자민 버틀러 소장, 윌리엄 로즈크랜스 소장, 조셉 홀트, 그리고 전 재무장관 겸 상원의원 존 딕스가 있다.
후보 | 1차 투표 |
---|---|
에이브러햄 링컨 | 484 |
율리시스 S. 그랜트 | 22 |
기권 | 19 |
2. 2. 민주당
1864년 8월 민주당 전당대회는 '평화 후보' 조지 B. 매클레런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6] 민주당은 전쟁과 평화 문제로 분열되었는데, 타협안으로 친전쟁 장군 매클레런을 대통령 후보로, 반전 하원의원 조지 H. 펜들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14] 전당대회는 평화 플랫폼을 채택했지만,[15] 매클레런은 개인적으로 이 플랫폼을 거부했다.[16]1864년 민주당 후보 | |||||||||||||||||||||||||||||
조지 B. 매클레런 | 조지 H. 펜들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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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제4대 미국 육군 참모총장 (1861–1862) | 미국 하원의원 오하이오주 제1선거구 (1857–1865) | ||||||||||||||||||||||||||||
선거 운동 | |||||||||||||||||||||||||||||
민주당은 '전쟁 민주당원'과 평화 민주당원으로 분열되었고, 이들은 다시 여러 파벌로 나뉘었다.[12] 구리머리로 알려진 과격 평화 민주당원들은 전쟁이 실패라고 선언하고 적대 행위의 즉각적인 종식을 선호했다.[13]
조지 B. 매클레런은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해 경쟁했고, 호레이쇼 시모어의 지지자들은 그의 이름을 전당대회에 올리려 했으나, 시모어는 후보가 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결국 매클레런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조지 H. 펜들턴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29]
2. 3. 급진 공화당
1864년 5월, 공화당 내 흑인 투표권을 주장하는 급진세력은 급진공화당을 창당하고 존 C. 프리몬트 전 상원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6] 이들은 존 C. 프리몬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프리몬트는 이후 후보직을 사퇴하고 링컨을 지지했다.[7]1864년 5월 29일, 오하이오주에서 급진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15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온 대의원들은 당명을 "급진 민주당"으로 채택했다.[17] 전당대회는 프레몽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그는 1864년 6월 4일에 지명을 수락했다. 그는 전국 연합당 전당대회가 링컨 이외의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면, 자신은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존 코크레인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18][19]
3. 선거 과정
미국 남북 전쟁 중에 치러진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전례 없는 민주적인 행사였다.[6] 전쟁이 주요 쟁점이었으며, 에이브러햄 링컨은 전쟁 승리를 통한 노예 해방을 주장했다.
공화당 내 급진파는 존 C. 프리먼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지만, 프레몬트는 이후 사퇴하고 링컨을 지지했다.[7] 전쟁 민주당원들은 공화당과 함께 국민 연합당을 결성하여 링컨을 대선 후보로 내세웠다.[7] 국민 연합당은 공화당에 투표하지 않을 전쟁 민주당원과 남부 국경 주 연합주의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임시 명칭이었다.
일부 전쟁 민주당원들은 공화당에 합류하여 국민연합당을 결성했다.[9] 링컨은 대부분의 공화당원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1864년 6월 국민연합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으로 재지명되었다.[10] 당 강령에는 남부 연합의 무조건 항복, 노예제 폐지를 위한 헌법 수정, 흑인 군인의 사용과 링컨의 전쟁 수행 능력 칭찬 등이 포함되었다.[11] 부통령 후보로는 앤드류 존슨이 지명되었다.
민주당은 전쟁과 평화 문제로 분열되었으며, 친전쟁 장군 조지 B. 맥클레런을 대통령 후보로, 반전 하원의원 조지 H. 펜들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타협안을 채택했다.[14] 전당대회는 평화 플랫폼을 채택했지만,[15] 맥클레런은 개인적으로 이를 거부했다.[16]
1864년 선거는 18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 처음으로 전쟁 중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였다. 링컨은 재선 가능성이 낮다고 믿었지만, 몇 가지 정치적, 군사적 사건들이 그의 재선을 도왔다. 민주당은 전당대회에서 내분에 직면했고, 프레몬트는 경선에서 사퇴하며 링컨 지지를 선언했다. 또한, 모빌 만 전투와 애틀랜타 원정에서의 승리로 전쟁 노력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회복되었다.[20]
결국, 연합당은 "개울 한가운데서 말을 갈아타지 마라"는 구호 아래 공화당과 전쟁 민주당의 힘을 결집했다. 링컨은 해방을 중심 문제로 만들고, 주 공화당은 구리머리파의 배신을 강조하며 활기를 띠었다.[21] 11월 8일, 링컨은 일반 투표와 선거인단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다. 북군 병사의 70% 이상이 링컨을 선택했다.
몇 달 전 주별 선거에서 국민통합당은 오레곤주, 버몬트주, 메인주, 오하이오주,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4. 선거 결과
득표